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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우리 서해 앞바다에선 지난 30년간 약 10만 점의 진귀한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천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옛 모습 그대로인 건 유물들을 감싸고 있던 갯벌이 방부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데요.

이 유물들은 대부분 훼손되지 않고 당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타임캡슐이라고도 불립니다.

안다영 기자가 최근 확인된 조선시대 침몰선과 유물의 발굴 모습, 그리고 그 이후 과정을 밀착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태안 앞바다 마도.

인근 해역에서 최근 5년 사이 고려시대 난파선 세 척이 잇따라 발견됐습니다.

국내에 단 하나뿐인 290톤급의 수중 발굴 인양선, 누리안호가 이 마도 해변에 정박해있습니다.

닷새간의 정비를 마친 누리안호는 잠수사와 조사관 등 십여 명을 태우고 올해 마지막 항해에 나섰습니다.

마도에서 약 1km 떨어진 해역.

예로부터 거센 물살로 선박의 항해가 어려워 '난행량'이라 불리던 곳입니다.

이곳 마도 해역은 '바다의 경주'라고도 불릴 만큼 해저에 많은 수중 유물이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조선시대 문헌에는 한 해에만 수백 척의 배들이 침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한 달 전에는 조선시대 것으로 보이는 침몰선, 마도 4호선이 새롭게 발견됐습니다.

닻을 내리고 해저 정박 작업을 한 지 4시간 가량.

잠수 인력이 산소 공급 장비를 매달고 수중 발굴에 나섭니다.

전문 잠수사와 유물 조사관이 2인 1조가 돼 수심 10미터 지점까지 내려갑니다.

산소 공급 호스에 의지해, 해저에 도달하면, 탐침으로 갯벌 속을 찔러보고, 손으로 일일이 해저 유물들이 파묻혀있는지 만져봅니다.

<인터뷰> 김인묵(잠수사) : "5미터 간격, 10미터 간격 줄을 쳐놓고 1미터 깊이로다가 뻘을 파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도자기 파편이지만 주변에 어느 시대,

어떤 유물이 있을지 가늠케 하는 신호 역할을 합니다.

흩어진 파편들을 따라가다 갯벌 속에서 조선백자 다발이 발견됐습니다.

백자 다발로부터 불과 25미터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나무 판재들.

마도 4호로 명명된 선체의 일부입니다.

수중 탐색 결과 마도 4호의 규모는 길이 11.5미터, 폭 6미터 정도로 추정됩니다.

선체 주변에서는 조선시대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사기 2점도 발굴됐습니다.

수중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누리안호 통제실에서는 CCTV 화면을 통해 실시간 발굴 상황을 확인합니다.

<녹취> 홍광희 : "탐색된 주변에 유물 같은 거 있어요? 잠수사: 아직 확인되는 유물이 없습니다.

<녹취> 홍광희 : "주변 꼼꼼하게 살펴보세요. 탐침도 해보시고."

누리안호는 동시에 4명의 잠수 인력이 최대 수심 80미터 지점까지 내려갈 수 있고, 한시간 반 가량 작업이 가능합니다.

수백 년간 갯벌 속에서 잠자던 유물이 잠수사의 손에 끌려 해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어패류 껍데기가 군데군데 묻어있고, 색이 벗겨지긴 했지만 역사의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이지희(학예 연구사) : "형태와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유약을 통해서 재질이 확인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고려시대 청자이고 이거는 조선시대 백자입니다."

지난해 첫 발굴 작업에 나선 누리안호는 통일신라시대 배인 영흥도선을 시작으로 4백 점에 이르는 유물을 발굴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마도 4호선과 이 배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사기 2점, 그리고 조선백자 111점은 누리안호의 최대 성과입니다.

<인터뷰> 이지희(학예연구사) :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지방에서 제작된 백자로 생각이 되는데요. 지방에 전체적으로 가마가 여러군데 산포해 있어서 굳이 해상유통이 불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자의 해상유통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자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년 초 마도 4호선이 인양되면 가장 먼저 옮겨지게 되는 곳, 바로 이곳 탈염실입니다.

현재 이 대형 수조에는 마도 2호선과 3호선의 선체 일부가 담겨있습니다.

800년간 나무 속 깊이 스며든 염분을 빼는 작업입니다.

<인터뷰> 남태광(학예연구사) : "이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나중에 보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바닷물 속에 있는 염분이 결정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목재 내부에서부터 그 부피가 커지기 때문에 변형이 이뤄지게 되죠."

2-3년간 소금기를 뺀 선체는 경화실로 옮겨집니다.

오랜 시간 물 속에서 물러진 목재를 화학 약품에 담가 단단해지도록 만드는 겁니다.

인양 후 탈염과 경화, 보존 처리를 마치고 최종 복원까지.

처음으로 발굴한 침몰선, 신안선의 경우 20년이 걸렸습니다.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이 신안선이 발굴된 건 70년대 후반.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던 14세기 중국 무역선인 신안선에선 중국 도자기와 동전 등 유물 2만 8천여 점이 출수됐습니다.

신안선 발굴은 우리 수중 고고학의 탄생을 알린 신호탄이 됐습니다.

이후 30년의 수중 발굴 역사가 집적된 국립해양문화재 박물관.

20차례의 발굴 작업을 통해 인양된 고선박과 해저 유물이 최종 복원을 거쳐 전시돼있습니다.

이 가운데 백미는 당시 고려청자 생산지인 강진에서 수도 개경으로 가다 침몰한 태안선의 유물들입니다.

무려 2만 점의 고려청자가 거의 완벽한 보존 상태에서 무더기로 발굴됐습니다.

<인터뷰> 전호신(학예연구사) : "어부가 주꾸미를 잡다가 이 고려청자가 주꾸미를 통해서 빨판을 물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2007년, 2008년까지 약 2만3천8백15점에 달하는 유물을 발굴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도 2호선에서 나온 고려청자 매병 두 점.

연푸른 빛이 감도는 국화와 연꽃 무늬 청자가 8백년 시간을 무색케 합니다.

장식용품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던 이 매병들은 당시 시대상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인터뷰> 박예리(학예연구사) : "매병과 함께 화물표인 죽찰이 발견됐습니다. 그 죽찰에는 매병에 개경에 있는 중방 오문부에게 꿀을 담아 보낸다, 참기름을 담아 보낸다 이런 기록이 함께 발견됐습니다. 그래서 저 매병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보다도 실용적 가치가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에"

실물 복원된 두 척의 배와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도자기 등을 빼고 나머지 유물들은 모두 수장고로 보내집니다.

지난 1976년 국내 처음으로 해저에서신안선이 발굴된 이후 지금까지 12척의 선박과 약 10만 점의 해저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중앙박물관 등으로 이관된 신안선 유물을 제외한 약 4만 5천점의 해저 유물이 이곳에 보관돼있습니다.

수장고로 가기 전까지 대부분의 유물은 해저 유물의 종합병원이라 불리는 복원실에서 수년간을 보냅니다.

그 형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문화재적 가치와 그 시대 생활상도 복원됩니다.

<인터뷰> 문환석(과장) : "처음 이런 이형 도기나 토기가 나왔을 때 용도를 몰랐었습니다. 악기 장한테 악기로 한번 용도를 확인해봤습니다. 그래서 아 이것은 통일이나 고려시대 때 북으로 내지는 작은 장구로 이렇게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저에서 처음 발견된 대나무 소반은 3년 만에야 비로소 원형을 되찾았습니다.

이 진귀한 소반은 신라시대 천마총에서 발견된 대나무 장식품 이후 대나무 유물로는 처음입니다.

<인터뷰> 차미영(국립해양 주무관) : "고려시대에 굉장히 공에품이 발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대나무로 만들어진 형태의 공예품이 지금 남아있는 사례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대나무 공예픔으로서 가치가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택배를 보낼 때 운송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죽찰은 당시 선박의 정확한 연도를 파악하게 한 핵심 단서가 됐습니다.

마도 1호선에서 처음으로 나와 보존 작업 중인 죽찰입니다.

60간지 가운데 정묘와 무진이란 한자와, 받는 사람에 대장군 김순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문헌 속 김순영의 활동 시기를 볼 때 정묘는 1208년, 무진은 1209년에 해당돼 마도 1호선이 1209년에 난파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인터뷰> 임경희(학예 연구사) : "이렇게 보면 양쪽에 흠이 있습니다. 그래서 몇몇 죽찰이라든가 목간에는 여기에 끈으로 매어져 있어서 여기에는 누가 보냈다라고 하는 그런 발송자가 적혀있고, 또 하나 누가 받았다고 하는 수신자가 꼭 적혀있게 되는 겁니다."

통나무를 원형 그대로 켜켜이 쌓아올려 만든 마도 1호선.

선체와 갑판, 돛까지 당시 모습 그대로 실사 복원하는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시대 배들과 실려있던 죽찰, 문헌 기록 등이 복원 작업의 토대가 됐습니다.

<인터뷰> 홍순재(학예연구사) : "이전에 나온 배들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배들인데 총 8척이 나왔는데 그런 배들에 대한 구조들이 지금 다 접목돼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고려시대 청자운반선, 태안선을 전통 방식 그대로 재현한 온누비호.

두 개의 돛을 올리고 방향타를 돌리자 바닷길을 가르며 서서히 항해를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마지막 뱃사공인 84살 신연호 씨가 돛단배의 키를 잡았습니다.

<녹취> 신연호(마지막 뱃사공) : "허리 들으쇼 들으쇼. 잡아당겨. 계속 잡아당기시오. 이 물은 놔두고. 이 물은 오히려 터줘."

뱃사공이 사라지며 사실상 명맥이 끊긴 전통 항해 기술과 뱃길 복원은 고선박 발굴이 낳은 마지막 결실입니다.

온누비호는 강진에서 강화도까지 천년 전 뱃길을 따라 사흘에 걸친 여정을 운항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곽유석(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관) : "실제 그 배를 가지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항해를 할 수 있을까하는 그런 것들이 밝혀지는 거죠. 그래서 그 작은 몇 조각 유물이 바탕이 돼서 이런 여러가지 전통항해술이라든가 조선 기술 이런 것들을 찾아내고 계승하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추정되는 난파선은 3백만 척 이상.

해저 유물은 지상 유물에 비해 비교적 훼손과 도굴 위험이 적고, 발굴이 걸음마 단계라는 점에서 연구와 투자 가치는 무궁무진한 분야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초의 수중 탐사선인 18톤급 씨뮤즈호와 전문 인양선인 누리안호를 보유해 한중일 수중 고고학을 선도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누리안호의 3배 규모인 전문 인양선 '고고 1호'를 취역하며 수중 발굴에 박차를 가하는 등 그 격차를 좁혀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수중 조사 인력은 20명 안팎에 불과하고, 조사 기관 역시 한 곳밖에 없습니다.

<인터뷰> 소재구(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 : "어디서 유물이 발견되거나 제보가 들어오거나 탐사를 하게 되면 우리는 강원도 속초부터 서해안 백령도까지를 다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만큼 넓은 권역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해저 발굴의 최대 목표는 사라진 거북선을 찾는 것.

최초의 신안선 발굴 이후 지난 30년간의 숙제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12년, 명량대첩 당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소총통 발굴 이후 임진왜란 관련 유물 발굴은 답보 상태입니다.

상당수의 문화재가 불타버린 임진왜란 당시 우리는 그때의 역사도 함께 잃었습니다.

구멍뚫린 역사의 퍼즐 조각을 품고 있을 바다.

이 해저 발굴에 마지막 희망을 거는 이유입니다